불이분재도량
제1회 회원작품전
제1회 회원작품전
나무의 힘
자택에서 누구에게 보이지 않고 저 혼자 즐긴다면 모르나
전시회 출품작의 진열법을 보면
그 인품까지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할 정도로 진열은 어려운 대상이다.
진열은 겸양의 마음을 가지고 행해야 하며, 감상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예법 없이 분재 예술이 될 수 없음을 반드시 새겨야 한다.
출품작은 반드시 배양과 유지관리 상태가 좋아야 한다.
나무는 진열하기 전에 꼼꼼한 손질은 물론 티끌하나 남기지 않도록 깨끗이 해둔다.
표토는 한층 더 깨끗이 해야 한다.
이끼도 길지 않게 잘 관리된 상태라야 한다.
나무와 분이 반드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분은 충분히 마른 걸레질하여 정성스럽게 다루어야 하며
조금도 더러운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일본 분재 진열 작법 중에서>
저희들의 지향은 "기본에 충실한 전시회"입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다음, 또 그 다음 전시회를 통해 완성도를 갖춰나가려 합니다.
거침없이 하이킥!
불이 분재도랑 제1회 회원 분재 작품전의 배경과 의미
‘한국 분재, 누군가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하이킥을 내질러라…’ 분재는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고 무수했던 그럴 무수한 하늘에 구속에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전례를 넘어 쇠퇴의 기미조차 보이는 우려 분재 세상은 새로운 도전 없이 희망은 없습니다.
불이분재도랑의 제1회 회원 작품전은 그간 상호간 도탑고 덕된 구속에 ‘결실’인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만족과 자축에 이름 때까지 기다리느니, 부족하더라도 시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백문은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과도 하듯, 전시회를 직접 경험함으로써 폭넓게 배우고, 분유의 의견을 두루 살펴 듣고, 하나 하나를 깊이 생각하며, 깨달음을 얻는 것이야말로 참된 공부가 아닐까 생각하였습니다.
네 차례의 품평회와 네 차례의 공동 촬영 과정을 회원들도 하염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했던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작품 형식에 따라 나무의 형상이 달라지고, 나무의 힘이 강해지거나 사라지는 일은 차라리 경이로웠습니다. 말뿐이 지지고, 신경이 예민해져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이내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돌아와 부족한 부분을 하나씩 채워 왔습니다.
저희들의 지향은 "기본에 충실한 전시회"입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다음, 또 그 다음 전시회를 통해 완성도를 갖춰나가려 합니다.
힘들었을 많은 세 스스로 다독여주고 4가지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첫째는 기본이 갖추어진 나무로 출품한다. 둘째는 개발 작품 전엽과 전체 연출은 설정된 컨셉(concept) 아래, 감상의 리듬감을 만들며, 셋째는 준비 과정에서 성의와 정성을 다하고 정착을 지키고, 끝으로 예심을 거쳐 전시회를 가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첫 전시회라 없는 것들이 많아 시간적, 경제적, 정신적 부담이 가중되었습니다. 또한 사람인지라 불쑥 불쑥 첫 전시회에 대한 욕심도 자제하기 슆지 않았습니다. 어느덧 8부 능선을 넘었습니다. 남아있는 보름의 준비 기간과 전시회 이후에 맺게 모든 과정을 세세하고 꼼꼼하게 챙기고 충실하게 참여한 회원들은 보람을 느끼고, 긴장은 오히려 전시회의 즐거움에 흠뻑 젖습니다. 전시가 될 수 있다면 바라는 내외가 없을 것입니다.
불이 분재도랑의 제1회 회원 작품전에 참여하는 애호가들은 분재력 30년에서 갓 1년까지, 연령 분포도 70대에서 30대 중반까지 실로 다양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들 사이에서 분재력과 나이는 힘을 앓고, 함께 모여 공부하는 의미와 소중함이 부각되었습니다.
기존의 분재관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나무야말로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야 하며, 생각으로 만드는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분재 행위가 단순히 나무를 가꾸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수양하며 깨달음을 얻는 과정, 즉 양생지도, 배지양심(養生之道, 培之養심) 의 과정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한국 분재는 한국 고유의 미적 특성을 담아야 하며, 한국인의 정취에 맞도록 가까우며 또 공존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미학에서 비롯된 자연스럽게 미적 특질로 이어졌고, 그 안에서 선과 여백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분재가 갖추고 있었던 행위로부터 비롯서, 선과 여백으로 눈을 돌리며 바로 눈(直眼)으로 보려는 마음, 눈높이를 분재를 통해 얻으려는 의도와도 닿게 된 것입니다. 예비부터 엄밀히 체험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과정입니다. 의외로 빠른 속도, 허상할 수 없을 만큼 깊게 갈 수도 있는 분야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조금은 다른 뜻을 담고 있지만 어느 회원이 이렇게 썼습니다.
“어쨌던 길이 아닌 길을 가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길 없는 길이면 어떻습니까.
까짓 것 뭐, 제가 걸어서 닦으면 길이면 되지요.”
그렇습니다. 그만한 배짱도 소신도 없다면 분재는 못 하려 할겁니다?? 불이 분재도랑의 회원들은 기존의 관점에서 분연 조금은 벗어납니다. 모르겁지 나무에는 맛이 있어야 하고, 분재 해오가라면 맛이 있어야 합니다. 맛과 멋은 분재 창작과 평가의 기준은 수없이 말해 왔던 ‘멋’이 중요한 것이지, 누군가 좋다고 하거나 누군가 안 된다고 하는 것에 연연할 이유는 사라집니다. 허름한 식당이 청국장 냄새 풀풀 풍기며 있지만, 때로는 그 맛이 입에 착착 달라붙을 수 있습니다. 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유 음식을 통해 요리인들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요? 그것이 바로 본질(本質)이자 갖추기 원하는 마음 가까이에 분재하는 태도입니다.
반드시 거쳐야 할 제1회, 산적한 고민들
누군가 총대를 메지 않는다면 전시회 개최는 늘 고민의 떡밥입니다. 또한 어느 전시회건 개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며, 준비 덕으로 제1회를 2~3년 늦춘다고 해서 시행착오가 줄지는 않습니다.
불이 분재도랑의 첫 전시회 준비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출품작을 선정하고, 속전 속결로 3차의 품평회를 거치면서 회원들은 조금씩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첫 전시의 규모, 바야: 기간까지 짧기 때문에 회원들의 출품작은 외따로 세워 먹맛났고, 일본의 화려, 장식적인 조형적, 심상적으로 어려움이 떨어집니다. 이 젊은 전시회의 진열과 연출 속에서는 미리부터 어려움이 예상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색이 분명하고 의도가 뚜렷한 진열과 연출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몇 가지 요소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첫째는 출품작들의 완성도입니다. 이는 전시회의 핵심이므로 누구든 고민할 요소지만 역사가 짧은 동호회의 전시에서는 더욱 부각되는 문제입니다.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과정을 중시하여 기본이 튼튼한 나무들을 선정했습니다. 완성에 필요한 구성 요소가 다소 부족하더라도 현재까지 관리가 충실했다면 그 미래는 관람자들의 상상에 맡겨보자 하였습니다. 엄격히 말해서 범미에다, 기본일 수 있지만 이는 불이 회원들이 만드는 첫 전시회에 피할 수 없는 한계입니다.
둘째는 화분의 선택입니다. 출품작 대부분이 배양 중인 탓에 화분 교체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불편적이었습니다. 다양한 화분을 놓고 검토한 후, 약 80%를 호양(舊鉢) 화분에서 끝내왔습니다.
화분은 기준에 얽매이기보다, 송백류 작품은 유약분에 심거나 야생화용·주물럭 화분에 심는 등 나무의 형상과 연출 의도에 맞도록 선택의 폭을 확장하였습니다. 이 같은 작업에 호양 화분은 여러 가지로 유익하였습니다. 반대로 일본의 유약 화분은 고가구, 교재와는 어울림이 매우 떨어집니다.
셋째는 화대, 장식장 등의 진열 보조물입니다. 애당초 불이 회원들의 작품은 수형 성숙의 차이로 인해 일본 화대, 장식장과는 어울림이 떨어져 돌파구를 찾아야 할 문제였습니다. 해결 방향은 ‘우리 것에서 찾는다’는 생각 하나였습니다.
우리 생활에 활용되었던 전통 목가구와 고재(古材)들은 마음에 들면 값이 매우 비쌌습니다. 게다가 이를 살필 줄 아는 안목마저 부족하니 첩첩산중, 결국 경제적 부담이 덜한 것 중에서 회원들의 나무와 어울리겠다 싶은 것들을 구하고, 자산 선생님으로부터 화대, 지판, 고가구 등 20여 점의 귀한 소장품들을 빌렸습니다. 용감하게 시도하였으니 더 나은 모습은 향후 전시회에서 해결할 과제로 남겨둡니다.
전통 생활 가구와 고재의 부족은 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일부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나무와 돌이 잘 어울리면 이는 구상(構想)의 정경에서 심상(心象)의 정경까지 두루 아우를 수 있는 장점이 발휘됩니다. 중국 본계인들은 사산분경을 통해서, 한, 일의 본계인들은 석부 분재를 통해 이를 표현해 왔습니다.
(사진 캡션 1)
주름(皺)과 색이 좋은 산형석 위에 곡수를 올려 바위와의 합한 생장 환경 암시
(사진 캡션 2)
평범하고 수수한 돌을 활용 감나무가 있고 나지막한 뒷동산이 있는 고향 마을의 정경을 표현
가장 힘들었던 문제는 회원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생명을 갖고 분재를 취미 삼는 사람들이 모여서 전시회를 개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루 한 종일이 소요될 분평회 3차례, 또 그 마음이 지쳐 중도에서 포기했던 4번의 촬영, 분을 교체하고, 나무를 다듬고, 저마다 담당한 일까지 처리하자니 힘들다고 짜증이 날만 합니다. 전시 진행 연습은 듣는 듯 마는 듯 대답밖에 했고, 몇몇 회원들은 이렇게까지 해서 전시회를 열어야 하는가 의문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다행히 연말, 연시의 바쁜 일정 속에서 부단히 자신의 땀을 흘려 준 회원들 덕택에 준비는 차분히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연장자 회원인 장준호(張埈鎬), 성재곤(成在坤), 김영화(金永和), 송춘섭(宋春燮), 강주환(姜柱煥), 오예진(吳禮珍) 부부의 애정, 그리고 가외의 시간을 전시 준비에 할애한 박문수(朴文秀)의 헌신은 모든 회원들로 하여금 자신의 땀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모름지기 전시회는 천리 길을 오시는 손님이 단 한 분 뿐이라도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 합니다. 이는 또한 오랜 세월 가꿔온 나무에게 바치는 흔치 않은 예(禮)이기도 합니다.
불이 분재도랑을 처음 방문하면 나무들의 수형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불이의 회원들의 소장품 중에는 태간 모양목이 거의 없고, 서울, 경기 지방의 애호가들에게 흔한 일본 수입목들도 많지 않습니다.
작대기 처럼 길쭉한 나무들이 많고, 상대적으로 다간 수형이 많습니다. 상부는가볍고 성글며 단출합니다. 이런 나무들을 휘 돌려보면 값싸 보이고, 없어 보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불이 회원들의 나무가 왜 이 모양일까?
불이의 회원들은 뿌리뻗음, 그루솟음을 중시하고 부등변 삼각형으로 상부를 빈틈없이 마무리하는 분재의 형태는, 일본 주류 분재의 규범과 형식이며, 전통으로 인식합니다. 일본 분재인들은 일본적 미감에 입각해 일본 분재의 정체성을 만들었듯, 불이의 회원들은 불이의 정신, 특질 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미적 독립은 분재의 형식에 반영하기 위해 공부하고 실천합니다. 자신이 만든 나무가 한국인들의 의식과 정서를 담아내려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정한 마무리 형태보다는 가볍고, 그루솟음보다는 ‘즐김의 흐름’을 더욱 중시하고, 즐김의 흐름이란 나무 형상의 핵심적 요소로 파악합니다.
한국인이라면 스시와 카레와 피자를 즐겨 먹더라도 대개는 김치와 장맛을 잊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음식도 먹다 보면 묵묵한 한 숟갈 밥에 된장국, 김치가 있어야 제 맛을 느끼듯, 한국인의 분재 역시 일본의 형식을 흉내 내어서는 맛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한국의 나무에 맞는, 한국인 취향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불이의 회원들은 ‘나무의 본성이 살아있는 참 맛을 발견하기 위한 긴 여정’을 즐기고 있습니다. 덧붙여 한국 고유의 미적 특질을 찾아 분재의 형식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방식을 찾아 실험과 탐구를 거듭합니다. 분재를 단정히 작품으로 만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연의 맛을 반영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거울 삼아, 나무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려는 탐구와 창조를 시도합니다. 인격을 갖추어야만 나무의 철학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문제는 불이 회원들의 이런 생각과 시도가 아직은 진행 중이라는 점입니다. 단정하고 예쁘게만 부각되고, 시형화와 거품의 형식에 얽매여 완성이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방식에 맞는 예제가 아니어서, 수형 상 각처에 거친 요소가 부족한 경우도 많습니다. 전시를 감상하신 애호가 여러분들께서 너그럽게 보아주시기를 또한 고주와 해학이 곁든 고언을 청할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해외 여행을 다녀오면 보따리 가득 외국 물건을 사 들고 들어와 여기저기 선물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귀하기도 했고 우리가 만들지 못하거니 질적 차이가 컸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선물들 대부분은 보잘것없거나 해외여행자라면 누구나 늘 가져오던 물건들이었습니다. 누군가 귀띔해 준 좋다 하는 것들, 일본에 가면 코끼리 압력 밥솥, 중국에 가면 우황청심환, 호랑이 기름 등입니다. 여행자임에도 여행은 뒷전, 그 물건을 구하느라 정신이 팔렸습니다.
욕먹을 소리가 될지 모르지만 우리가 귀하고 소중히 받는 분재는 그 수준이 이와가 추측해 봅니다. 근자에 들어 중국에서 대량으로 반입된 역사가 재벌이 크고 있으며 명목과 관상미는 분재의 제격이 되지만 몇 만원, (크게 선심 써도 30만 엔) 선물 수준으로 거래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완성에 가깝게 만들어진 분재라면 코끼리 압력 밥솥 같은 상품일 뿐이며, 많은 초보 여행자들이 속아 사온 가짜 우황청심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정작 일본 분재로부터 사고,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의 정신과 태도 그리고 진짜 기술입니다. 최고 경지에 이른 예술가와 예술 작품은 국적이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표현 방식이 서로 달라도 치열한 예술혼. 작품에 내재된 정신과 의식은 모두가 동일한 가치를 갖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구호는 식상하지만 수없이 들어왔지만, 수천, 수만 번을 더 듣는다 한들 그 보편적 진리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도 볼 수 있고, 저기서도 볼 수 있거나, 돈을 조금 더 지불하면 좀 더 나은 수석의 분재를 쉽게 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무가 아닙니다. 크기와 외형이 꼭 닮은 느릅나무와 굴참이 있다면 둘 모두 나무는 못됩니다. 분재라는 형식이 남용되고, 분재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수형만을 따르는 나무는 본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분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분재의 본질에는 나무의 본성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분재란 본래 인간이 자연을 통달하거나,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본성을 분재로 접근하거나, 유약하게 그 형식을 좇는 바람잡이도 아닙니다. 하려다가는 나무가 중심이 되어야 하며, 나무의 본성이 살아있어야 분재는 나무로서 나무답지 못한 모습이 됩니다. 이것처럼 분재 세상은 주객이 바뀌었거나 앞뒤가 비틀려 있습니다.
때때로 인간의 사념과 정서가 나무의 본성과 일체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에 예상치 않은 유쾌한 감정에 취하고, 감동의 물결에 환희하기도 합니다. 무릇 진지한 분재는 나무의 본성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있는 나무의 잘 무늬를 즐기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거나, 아름다움을 창조하거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하는 것이 바로 분재 행위입니다. 분재 행위는 ‘억지’를 부린다면 될 일이 아닙니다. 억지로라는 말에는 조건이 맞지도 않고, 억제, 강제로 뜻합니다. 이제야말로 우리들의 분재 행위에서 ‘억지’를 버리고 나무의 본성이 살아있는 참 맛을 찾는 사색의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인터넷을 통한 분재 정보의 확산과 공유는 가끔 물론 단편적이고, 변화의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긍정적 기능이 증가하고 발전함과 동시에, 분재 정신을 속되게 만들거나, 분재의 격을 떨어뜨리거나, 분재의 씨앗을 만드는 큰 장애물도 되었습니다. 인터넷 정보는 잘못되었거나 걸러지지 않은 정보들이 그대로 소통됩니다. 체계적인 탐구보다 단편적인 경험과 사례를 중심으로 소개되며 인터넷 분재 정보는 보편성과 사실성이 낮다. 분재 정보의 장단점을 판단한 안목의 형성보다는 정보 공유에 기술 집착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비판은 기피되고 창작과 동호간의 화합은 받습니다. 새로운 입문자들조차 그 의중에서 ‘아, 이게 분재구나.’ 하며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스마트 폰의 출현은 분재 정보를 더 많이, 더 빨리, 더 편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터넷 분재 세상에서 우리는 분재라는 고뇌를 통해 이 땅의 분재 역사와 현실을 통찰하며 한국 분재의 미래와 변화를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느닷없더라도 쓴 소리가 양념처럼 들어가야 ‘거칠음이 하이킥’으로 제맛 본잣을 살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전시회도 매 한 가지입니다. 우선 서울 경기 지역에 전시회가 한 열 개쯤은 늘어나면 좋겠습니다. 더워 앙가 덥고 추워서 더우면 나무들의 전시대 위를 버젓이 채우는 일도 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애호호 고민도 없이 줄줄이 나무들을 줄 세운 모습은, 주목이 빛나고 복목과 보조목이 한데 어우러져 한층 격조 있는 모습으로 바뀌기를 희망해 봅니다. 주최자는 깨끗한 복장과 태도로 손님을 맞고, 찾는 손님의 작업 차림에 운운하지 않습니다. 양복 상의를 입고, 구두를 신고 신이 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기에 흉룡 듯 합니다. 주변에서 손뼉 치르고 큰 소리 내어가며 휘휘 돌려보지 않고, 다소곳한 몸가짐으로 감상 삼매경에 빠진 모습들을 만난다면 더욱 흐뭇하겠습니다.
저희들의 첫 번째 전시회는
많이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전시회를 준비한 것은 이중에서 자가 진단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늘 사이 속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만만치 않고, 생각한 만큼 뜻대로 일어나지 않으며, 더 자주 커다란 과도들을 경험하려는 갈망에 수 있습니다. 전시회 출품은 회원 개개인의 분재에서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전형적인 목표일 것입니다. 또한 준비 과정을 통해 분재가 그저 나무만 잘 기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열과 전시를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는 깨달음을 얻고 함을 기대하였습니다.
전시회의 준비는 크게 ‘나무와 형식’으로 나누어 접근했습니다. 줄줄이 흐름이 좋도록 조화와 수량의 기본을. 대한 7현의 솔작준은 진연(陳列)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 된다고 말하였으니, 진연, 연출 등 전시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던 것입니다. 원칙으로 개별 작품의 진연은 전체적 기교와 흐름을 연출하기 위하여, 수종의 배합, 균형, 개별 작품 진연에도 전체 연출을 고려한 연출적 기법을 감안한 진연으로 하였습니다. 개별 작품의 진연은 1) 나무와 화분의 조화 2) 주목과 부목의 상관적 관계 3) 연출적으로 구성된 전체 흐름 등 기본 원칙을 초점을 맞췄습니다. 전시 전체의 원칙은 1) 작품의 감상 공간은 충분히 확보하고 2) 인접 작품과의 관계를 배려해 3)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리드미컬한 감상의 흐름이 이어지도록 감안하였습니다.
불이 회원들의 나무 만들기
불이의 회원 모두는 소장가가 아니라 자기 나무를 스스로 가꾸는 애호가들입니다. 아직까지는 잔재산 소재보다 부단히 얻는 자연에 의지해서 만들어가는 나무들이 대부분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잔재산 소재들도 많아지겠지마는 그 때가 되더라도 ‘만 원짜리 소재로 명목을 꿈꾸고, 이른바 만원의 행복’을 버리진 않겠습니다.
불이 회원들은 나무를 만들 때 억지를 부리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예를 들어 줄기의 흐름이 나무의 중심선을 두 번 세 번 이상 벗어나는 이른바 5타입은 대부분 기피합니다. 자연 본연의 수형을 거스르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쉽게 버리지 않음을 상례 삼고 있습니다. 솔작준 중에서 소나무류를 회원들이 갖고 있는 관심과 흥미의 측면에 생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도 억지로 억지기 구부리거나 내려 누른 모습은 없었습니다. 수고에 연연하여 위로 길게 줄기를 뻗치지 않고, 자연스런 흐름이 살아있는 소나무류를 좋아합니다.
불이 회원들은 개별 수종 고유의 특징이 살아 있도록 나무를 만들어 갑니다. 회원들은 나무의 특성이 사라지지 않고 우수한 영역 높은 모습으로 상류를 만드는 것을 금기처럼 여깁니다. 수종 고유의 특징, 즉 ‘소나무’는 분재를 만든다고 외모로 바꿀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꿋꿋함과 무겁고 강직한 가치를 갖는 은백색 소나무는 장구매의 본성과 오히려 괴리에 가깝습니다. 분재의 형식이 또는 사람의 손길이 장구매의 본성을 말살했기 때문입니다. 꾸꾸롭고 무겁고 강직함을 넘어 만든 화면에 변화와 불균조는 오히려 위배된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세월이 흐른다 해도 굳건히 줄기와 가지는 직선 본성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출품작들은 수종 별로 가치의 구성과 관계에 차이가 있습니다. 나무의 본성은 가치의 흐름에서도 그대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소사나무나 단풍나무 그러고 쥐똥나무가 가지의 가치 흐름에는 바람과 강한 햇빛을 좋아하고, 은일 은 단풍나무는 바람과 강한 햇빛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 영향은 나무의 구성과 형태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쥐똥나무는 위의 가지가 흩어지고, 밑의 줄기가 강조되어 모두 자연의 혼줄을 강하게 유지하는 수형입니다. 불이의 회원들은 수종 고유의 특성들을 세밀하게 관찰하여 가치의 흐름을 물론 가지 만들기에서도 그 같은 특징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가지의 구성만 보면 출품작들은 완성도가 떨어집니다. 배양연이 짧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큰 이유는 가치의 구조가 세밀하게 준비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가치는 줄기 굵기의 35%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비로소 형성됩니다. 당장이라도 굵은 가지가 보기엔 좋을지 몰라도, 오래 키울 수 없습니다. 출품작들은 가지를 내어 3년 5년 후에 매우 억겁하게 세력을 통제하기 때문에, 가지의 숫자를 빠른 증시킬 수 없습니다. 어쩌면 더 그렇게 하여야 가지의 굵어짐은 속도가 현저히 느려집니다. 나무로 큰 가치를 즐기려면 시간을 배양해야 할 길입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출품작에서 굵어져 봄을 가지는 쉽게 발전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1회 회원작품전의 전시 주제는 회원들께서, ‘선의 미학’ 이 아님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의 미학은 출품작들의 가장 중요한 미적 특징이지만 출품작 전체를 포함하지 못하는 약점을 갖습니다. 때문에 불이의 회원들이 지향하는 궁극적 가치로는 미흡하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분재가 단순히 자연을 흉내 내는 것에 머문다면 그것은 깊이도 반감될 것입니다. 나무는 자신의 생각을 갖고 있는 존재라면 인정할 때, 분재는 비로소 예술이 됩니다.
생각을 먹고 사는 나무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힘을 갖습니다. 회원들의 분재 행위는 어떻게 보면 나무 속에 숨겨 있는 힘을 찾는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 분재 행위는 나무 본성에 밀착해 흡수합니다. 말로는 쉬워도 실천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는 엄격한 질서를 갖고 있으며, 그 길을 찾기가 독창의 듯한 결과 같습니다.
‘나무의 힘’은 그렇게 불이 회원들의 첫 전시 주제가 되었습니다. 과연 출품작들이 감상자의 눈과 마음을 잡아 끄는 힘을 갖게 될지, 상상의 나래를 자극할 수 있을지, 직접적으로 은자의 풍류를 느끼게 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함께 읽고, 이야기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기대할 뿐입니다.
아울러 진열과 연출의 컨셉트는 ‘나무를 생활 속으로’, ‘돌과의 어울림’으로 정하여 다양한 생각과 시도를 펼쳤습니다.
진열과 연출은 나무 만들기에 이어지는 또 다른 창작 행위입니다. 진열과 연출이 창의적이며 배움에 얽혀 있음은 때때로 전시대 위에 놓였을 때 나무의 격이 달라집니다. 또한 나무 만들도록은 표현하기 힘든 상징과 정취를 만들어내 구성 요소들을 풍성하게 합니다.
진열과 연출은 이론적으로 쉬워 보이지만 막상 전시대에 적용하려면 어려움이 많습니다. 특히 동호회의 전시에서는 활용 가능한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연출하기 어려운 것이며, 그 자원이 부족할수록 난감합니다. 게다가 첫 번째 전시회여서 경험이 없었던 불이 회원들은 갖추어진 것이 없었으니 섭리상 감당이었습니다.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전시장의 환경을 쓸모있게 활용할 것을 찾으러 집안을 뒤지고, 도랑에 있던 돌과 괴목까지 제 짝을 찾아 주었습니다. 불이의 첫 번째 회원 전시회는 이처럼 중얼동원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불안하고 아쉬운 구석들도 남게 되었습니다.
거듭되는 촬영과 보정에 신동운(오제회 부회장, 남편님)은 과감히 지우셨습니다. 홍인표, 한재훈 두 회원은 나마른 감각으로 연출하지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었고, 회원들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연출에 매가거나, 늦은 밤 불빛을 떠오는 생각에 불을 밝히고 나무를 진열하기도 했습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모두들 미치지 않고서는 전시회를 마무리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사진 캡션)
거친 질감의 평석을 활용하여 제대로 자라지 못한 노간주나무의 힘찬 성장 환경 연출
(실제로 이 나무는 바위산인 관악산에서 채취하였습니다)
수폭이 큰 바람결 소나무를 돌기위에 올리고 작은 돌, 석부 분재와 연계하여 강온(剛温)의 양면성을 표현하려 시도
이번 전시회에서 돌의 역할은 상상 이상으로 눈부십니다. 돌은 나무를 올려 놓는 기능 이외에, 분재 전용 화대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또는 더욱 심미적으로 상징을 표현할 수 있는 장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대자연을 연상시킬 수 있는 힘을 갖춘 나무를 단 한 그루도 만들어보지 못했음은 물론, 내면을 반영한 나무 만들기는 지금 수준에서 감히 바랄 수도 없는 일입니다. 나무의 몇 몇의 요소를 더하여 대자연의 풍광과 정취에 가까이 다가서거나, 상징과 의도를 표현하려는 시도에 들인 노는 매우 유용했습니다.
막연히 생각에 머물렀던 나무와 돌의 어울림은 이번 전시회 준비 과정에서 좀더 구체적인 경험으로 쌓였습니다. 전시의 끝은 이어 간다면 뜻밖의 깨달음이 기다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고개를 듭니다.
큰산 바위를 상징하는 돌로 나무를 살짝 가려 놓음으로써 벼랑의 나무를 연출
벼랑의 상징은 동일하지만 돌의 형상이 큰산의 품을 상징과 어울려 조형성이 더욱 부각
나무를 실생활 속으로 끌어 들어 즐기는 애호가들은 얼마나 될까? 가족 모임이거나, 사람들을 초대했거나··· 분재 애호가로서 특별한 날 분재로 뭔가 특별함을 연출할 수 없을까?
우리의 전통 가구는 몇 몇을 제외하고는 기능성보다 골동으로서의 가치 또는 그 자체로 보고 느끼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품을 중심하는 분재와 오랜 세월이 흐른 생활 가구 사이에는 천연스러운 어울림이 생겨 납니다.
문갑 위에 올린 향나무
아래 공간에는 두 점의 소품
괴목 책상과 벗나무
책상 하단의 빈 공간이 한수의 맛을 더욱 강조해준다.
어느 안방에 놓였음직한
소형 장식 소품을 만들었다.
회원들의 탄성의 절로
나왔던 어울림이었다.
명자나무가
든든한 깨우침을 누른다.
이것이 나무의 힘이다.
살아있는 나무는 생명이 없는 존재까지 다시 숨쉬게 만듭니다. 좋아서 모은 고가구가 하나 둘 늘어나며 집안 누군가의 타박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앞서 살핀, 네 작품은 부연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익숙한 대상이 주는 편안함과 나무와 목가구라는 동질성 있는 질감과 화려를 쓸 때와 전혀 다른 느낌으로 그냥 다가서기 때문입니다.
쓰지도 못할 것, 애물단지로 처량한 생활가구로 나무를 연출해 보십시오. 타박만 일삼던 아내가 손님 초대를 자청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출품된 모든 나무의 전일한 연출이 진지해지는 흥미가 반감될뿐더러 문처럼 득의(得意)를 얻은 전일까직 빛을 버릴 수 있습니다. 다소 생뚱맞거나 튀는 구성도 끼워 넣어야 볼거리도 얘깃거리도 풍성해집니다.
지판의 중앙에, 쭈그리고 앉아 고뇌하는 세 명의 토상(土像)을 배치했습니다. 한쪽으로 쭉 뻗어 오른 소나무 아래서 저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작품 이름은 ‘사색의 여정’. 감상자의 자유로운 상상을 방해할지 모르니 더 이상은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아래 작품은 괴목 위에 간결한 팔세의 백하들을 살짝 올려 놓았습니다. 고목과 나무의 비중 차이가 낮쳤게 느껴지지만, 나무가 자라는 환경이 늘 입맞에 맞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부족 대신 배치된 황금 마사줄은 700개를 삼목해서 키운 것이니, 죽은 나무나 그 나무를 타고 앉은 나무를 바라보는 눈길이 어떨까 상상해 봅니다.
그냥 재미로 소 어울림 속에 나무를 넣어보았습니다. 아직 자신이 없기 때문에 실제 전시에서는 날마다 들어있는 나무가 바뀌지 모릅니다.
지난 봄부터 시작된 준비 과정을 들추려면 밤이 새도록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모두 풀어 놓으면, 2회 전시회 때까지 버티려낸 재간이 없으니 조금만 더 풀어 놓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다섯 나무로 연출된 작품, 마치 나무 모두가 쥐똥나무(초과작물).
송백은 무슨 이유로 진열의 주축으로 선호 되는가? 또 서로 다른 수종 서로 다른 수형이 어울려야 할까? 같은 수종, 유사한 모습이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수고 165센티의 큰 나무도 분재가 될까? 남도의 한 분재인이 ‘그 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때의 높이가 이상적인 수고(樹高)라 할 수 있다. 대품은 몇 센티까라는 규정은 엄매일 것이 못 된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불이도랑에는 지금 저 소사나무보다 더 커진 나무가 꿈틀꿈틀 자라고 있습니다.
2기와 4기 회원이 합작한 작품으로 별명이 ‘세삼남님’입니다. 줄기세줄과 굽음은 훌륭한 가운데 구입 가격이 2번째, 3번째를 차지할 만큼 비쌌기 때문입니다. 연출자가 심통이 나서 그 사이에 삼목으로 키운 매자 하나를 끼워 넣었습니다.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제목은 붙였지만 솔직히 두렵습니다.
공개를 계기로 하지는 않았지만 회원들 대부분은 분재력은 안구수태(眼高手低)의 경계를 넘지 못한 수준입니다. 개개인의 정성과 도합 최선의 완제품 수준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미처 채우지 못한 부분으로 인하여 멀리서 찾아 주신 분들의 마음 언짢게 하지 않을까도 염려됩니다.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객관적이고 엄격한 평가를 괘념치 않았다면 거짓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평정에도 자만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하여 전시회를 꾸몄으니 말씀 하나가 머리 속에, 가슴 속에 새겨지리라 생각합니다.
저희들은 이번 전시회를 ‘또 다른 비움의 계기’로 삼을 것입니다.
자신의 나무를 전시회를 통해 선보이는 일, 이는 어쩌면 그 나무를 버리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도리를 다하였던 세월을 버리고, 기득 품었을 모름 미래에 대한 욕심도 버려야 하니, 나무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혹은 미처 읽지 못했던 요소들을 깨달아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처음 길들은 이번 전시회는 저희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양이 될 것입니다. 전시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동력을 만들고, 참나무 분재인이 될 때까지 긴 세월을 정진하겠습니다.
오랜 시간 준비에 참여하신 회원 모두의 노고와 열정,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은 전시회를 찾아주신 분들의 사랑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더욱 노력하여 한결 성숙한 모습으로 두 번째 전시회를 만들 것을 약속 드립니다.
2011년 12월 31일
분재도랑 불이 회원 일동 (대표집필: 오영택)